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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류를 덮어두고 해괴망측한 정통파를 자처하지 않는다!”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수십년의 단절을 딛고 사회운동과 맑스주의의 결합, 학문방법론으로서의 맑스주의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르네상스’는 우리 사회의 극우적 이데올로기 지형을 변형시키는 중대한 사태였고, 이를 통하여 사회운동과 학계는 자신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초 ‘사회주의없는 사회주의’였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인민의 손에 의해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이 이루어지자, 한국에서 겨우 뿌리를 내리려던 맑스주의는 그 착근(着根)의 초입단계에서 엄청난 한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포스트 맑스주의’(post-Marxism)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맑스주의 선전과 함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는 물론 맑스주의 자체의 ‘해체’를 요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맑스주의의 위기론의 만개 그리고 ‘포스트 맑스주의’의 출현 등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캘리니코스의 지적처럼 맑스주의의 반대자들은 이제 맑스주의는 “푸닥거리해서 쫓아내야 할 귀신이며, 이성적인 토론에 적합하지 않는 하나의 발작이며, 벌써 오래 전에 논박이 끝난 오류” 라고 말할 것이다.
또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등은 맑스주의에 대하여 자유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고, 이제 자유주의에 따라 해결되어야 할 기술적 문제만이 남았다고 자신감있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반대한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다고 해서 맑스주의의 존립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맑스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모순이 존재하는 한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또 새로운 상황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본성을 갖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지만 자본주의 모순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세계화되고 있다. 자본주의로 역이행하고 있는 소련 동구의 현실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스탈린주의 탓이고 우리는 ‘진정한’ 또는 ‘순수한’ 맑스-레닌주의니까 괜찮다” 또는 “우리는 이미 맑스-레닌주의를 극복한 주체사상으로 뭉쳤으니 문제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현재의 사태가 일어나게 된 데는 그간의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의 안이함과 무능함이 원인을 제공했음은 분명하다. ‘사회주의’와 ‘노동자국가’라는 깃발 아래 이론과 실천이 전개되었다고 해서 그 이론과 실천이 당파성과 과학성을 자동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매카시즘적 비판도 금물이지만, 동시에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도 금물이다. 우리는 ‘사회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이루어진 여러가지 ‘비사회주의’ 또는 ‘반사회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직시해야 하며, 이러한 냉정한 현실인식에 기초할 때만 현실 사회주의의 틀을 넘어서는 혁신의 전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노동자는 말한다.

“우리는 오류를 덮어두고 해괴망측한 정통파를 자처하지 않는다!”

생각컨대 생산수단을 법적으로 ‘국유화’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의 분리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사회주의국가’가 선포되었다고 해서 그것의 ‘국가’로서의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산수단의 ‘실질적 사회화’와 ‘비(非)국가’(=‘인민의 자기통치’)로의 지향 그리고 변혁이 없는 사회주의는 껍데기일 뿐이다. 법분야에서도 법 자체가 갖는 억압성을 제거하고 ‘인민의 자치규범’을 창출‧배양하는 이론과 실천없이 법에 대한 엄격한 준수만이 말해질 때 그 법은 이미 ‘사회주의적’이 아니다. 요컨대 생산관계, 국가기구, 법규범 제도, 노동과정 등에 대한 변혁시도가 끊어지고체제유지생산력 발전만이 전면에 내세워지는 순간 사회주의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상을 간과하는 맑스주의적 이론과 실천은 맑스주의의 이름 하에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혁명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가 ‘통치이데올로기’, ‘국가이데올로기’화하여 “새로운 계급질서에 대한 스콜라주의적 정당화”를 수행하는 “국교(國敎)의 교리문답”이 되어버릴 때, 이는 결국에는 인민 스스로에 의해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분명히 직시하고 인정해야 하며, 맑스주의 이름 하에 행해진 기왕의 이론과 실천을 면밀히 검토 비판해야 한다. 이때 유의할 것은 이 작업이 단지 맑스주의의 청산과 해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민중적 입장에 선 민주주의를 더욱 확고히 하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극복전망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일체의 스탈린적 편향과 결별할 수 있으며, 동서에서 버림받고 땅 속에 묻혀버린 맑스주의의 혼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 조국, 현단계 맑스주의 법이론의 반성과 전진을 위한 시론, 민주법학 6호.
(글은 여기가 끝이 아님. 이건 서론)

어린 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글이다. 뭔가 눈이 뜨였다고 해야 하나..
아직도 사회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산주의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나라에 살고 있긴 하지만. 쩝.

by 벽에다화풀이 | 2008/11/07 19:48 | 트랙백 | 덧글(4)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좋은 형세 아래에서 불행하게도 '좌경유치병(左傾幼稚病)'이 출현하였다. 이 병을 가진 사람들은 공산당이 이미 정권을 장악하였고 중국 사회는 이미 무산계급이 독재(專政)하는 사회주의 사회가 되었으므로, 신민주주의 단계는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사람이 주관적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경제 기초(하부구조)에 대한 상부구조의 반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곧 장악한 정권을 이용하여 '하루가 20년과 똑같은(日天等於二十年)' 속도로 몇 단계를 '대약진(大躍進)'하면 중국 사회는 곧 사회주의 사회일 뿐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할 것이라 생각했다. 공산당은 농민을 이끌고 '일대이공[一大二公: 첫째는 커야하고, 둘째는 공유제여야 한다는 뜻. 인민공사(人民公社)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의 인민공사를 만들어 '공산당 바람'을 일으켰는데 공사의 사원에 해당하는 지역 농민들은 자신들이 속한 공사의 식당에서 무료로 밥을 먹었고 무료로 의료 혜택을 받았다. 이러한 좌경유치병은 갈수록 더욱 피해가 심해져서 오래지 않아 극좌파의 사조가 되었고 10년 동년으로 표현되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일으켜 중국 사회를 거의 전부 통째로 허물어 버리는 지경에까지 빠뜨렸다. 당시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구호로 외쳤지만 극좌파가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공상적(空想的)' 공산주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거스른 '공산주의'였다.

'문화대혁명'도 '성과'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극좌파가 내건 사상을 허황된 곳까지 밀고 나가 그 위해성을 완전히 폭로해 내어 집집마다 알게 하였다.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뒤 일 개월 동안 당 중앙은 극좌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쓸어 내고 혼란을 제거하여(撥亂) 바른 노선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발란(撥亂)이란 극좌파의 혼란을 뽑아버리는 것이었으며, 반정(反正)이란 신민주주의의 바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 펑유란, 『현대 중국 철학사』, 정인재 옮김, 34-35p

예전에 읽다가 적어둔 부분인데
요즘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by 벽에다화풀이 | 2008/10/16 13:34 | 취미생활 | 트랙백 | 덧글(0)

이름을 메모장에 적어 둡시다.

조갑제 씨가 2000년 6월 월간조선에 에디터 칼럼을 쓴 것이 있다.
제목은 "『金正日을 자극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공무원들의 이름을 메모장에 적어둡시다. 언젠가는 이 메모장을 써먹을때가 올 것입니다" (부제인가..?)

정말 적어 두었을지..? 하는 것은 사실 궁금하지 않다.

그런 정신이 부럽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그리고 사람들이 욕하건 말건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세..

그렇다면 몇 년 후가 될지 몇 십년 후가 될 지 모르는 미래를 대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by 벽에다화풀이 | 2008/10/14 06:27 | 취미생활 | 트랙백 | 덧글(0)

일본은 히틀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네타바레가 될 수 있지만
슈퍼로봇대전Z를 하다 보면 중간에 히도라라는 적이 나온다.
(이 적은 MX에도 나왔었고.. 그 전에도 나왔었지만 잘 기억이 안 난다..)
백귀제국의 총사령관(물론 원수는 따로 있음)이다.

생김새도 그렇고 이름도 그렇고 당연히 독일의 히틀러를 모델로 한 듯 한데..

일본은 왜 이렇게 당연히 히틀러를 '적'의 측에 놓았을까?
한 때는 친구였잖아. 의리도 없이.

어느새 일본은 스스로를 추축국이 아닌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많이 앞서나간 것이겠지만. 뭔가 좀 씁쓸하다.

by 벽에다화풀이 | 2008/10/08 08:57 | 취미생활 | 트랙백 | 덧글(0)

'비장애인' -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 사용에 관한 짧은 생각

 

최근 들어 광범위하게 쓰이기 시작한 ‘비장애인’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인간의 사고방식은 그 사회의 언어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사피아-워프 이론에 기초한 정치적 올바른(political correctness) 용어 사용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일정한 성과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동안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 사용의 용례와는 무척이나 다르다.


1. negro-black-african american

2. stewardess, steward-flight attendant

3. 일반인-비장애인


1의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 사용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negro의 대체어로 고안이 되었던 black도 대체어인 african american이 있고, 이 또한 새로운 대체어가 고안되고 있다고 한다. 이 경우는, black이나 african american이 일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 negro라고 불리며 차별되던 집단을 black이라는 것으로 부를 뿐이기에, black, 그리고 african american이 그동안 negro가 갖고 있는 의미와 상징 모두를 흡수해 버렸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인 올바른 용어 사용은 차별억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2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동안 stewardess라는 단어에 들어있던 차별과 질시는 steward와 묶어 새로운 용어인 flight attendant를 사용하게 되면서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1처럼 flight attendant가 새로운 대체어를 필요로 하게 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flight attendant는 stewardess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잠정적인 현상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flight attendant는 stewardess나 steward가 근무하는 양태를 고려하여 고안해 낸 대체어이지만, 단지 그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단지 있는 그대로에 대한 표현이기에 문제이다.

효과적인 차별억제를 위해서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그동안 우월한 지위에 있던 자들과 같은 차원에서 동등한 위상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용어 사용에 있어서의 적극적 평등 실현조치(affirmative action)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3과 같은 용법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 사용에 있어서의 최적의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소위 일반인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의 용어 사용에 있어서의 기득권을 완전히 박탈해 버린 것이다.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논의를 이어 본다면, 그동안 장애인이라는 용어 안에는 단순히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장애를 가졌기에 보통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차별적인 의미도 내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소위 일반인들을 비장애인이라 부름으로써 그러한 용어사용을 통한 차별억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차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을 다른 용어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차별적인 용어 사용을 행하는 것이다.

물론 비장애인이라는 용어 사용이 ‘장애’의 긍정이라는 차원에서 이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이다. 종국적으로는 장애가 단지, 머리가 빨갛고 노랗거나, 눈이 파랗고 검거나, 키가 크거나 작거나 하는 특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쨌건 우리 사회에 ‘비장애인’과 같은 용어 도입이 본격화 되면서, 점점-서구식 기준이지만-민주화가 진행되어 간다고 느껴진다. 만약 다음 이 글을 고칠 기회가 있다면 외국인 노동자(foreign worker)에 대한 UN이 제시한 대체어로서의 이주노동자(migrant worker)도 검토해 보고 싶다.

by 벽에다화풀이 | 2006/02/05 22:23 | 취미생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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